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인물로 지목된 안두희(1917-1996)를 둘러싼 국민적 분노는 50년이 넘도록 식지 않았다. 이 가운데, 안두희를 응징하거나 그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 두 인물이 있다.
바로 권중희(1936-2007)와 박기서(1954~2025)이다. 한 사람은 정의를 향한 평생의 추적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물리적 응징으로 역사의 심판을 대신했다. 마지막 한 인물이 지난 10일 별세하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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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중희, “하수인을 밝힌 사람”
권중희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청년 시절부터 김구 선생 암살 배후를 의심하며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87년 마포구청 인근에서 우연히 마주친 안두희에게 분노를 참지 못하고 각목으로 폭행, 언론에 ‘안두희 폭행사건’으로 보도되며 일약 주목을 받았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었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사회적 공감대를 얻었다. 그는 이후 “안두희는 배후의 하수인일 뿐”이라며 1992년 안두희로부터 ‘지시에 따라 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1995년 국회에 진상조사 청원을 올려 ‘백범 김구 암살 배후 조사보고서’ 작성에 기여했고, 암살의 배후로 당시 군부 내 반공세력과 미군정의 개입 가능성을 꾸준히 제기했다.
그는 2007년 파주시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뜻을 함께한 시민단체들이 조용히 모여 그의 삶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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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서, “정의를 실행한 사람”
1996년 10월 23일, 인천의 한 가정집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79세의 안두희가 한 남성에 의해 망치로 머리를 맞고 사망한 것이다. 범인은 박기서, 당시 42세의 택시운전사이자 예비역 병장이었다.
박기서는 “김구 선생을 죽인 자를 그냥 둘 수 없었다”며 범행 직후 자수했다. 그는 법정에서조차 “역사의 정의를 실현했을 뿐”이라며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의인'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정의는 개인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징역 5년을 선고, 1999년 가석방됐다.
출소 후 그는 백범 묘소를 찾아 사죄하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으며, 이후 언론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2025년 지병으로 77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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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넘은 두 얼굴의 정의
권중희와 박기서. 한 사람은 오랜 추적과 진상규명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외쳤고, 다른 한 사람은 물리적 응징으로 ‘개인적 정의’를 실현하려 했다. 둘의 행보는 방법과 결과는 달랐지만, 한 세기의 진실을 묻고자 했던 시대의 소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사적 진실이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지금, 우리는 여전히 그날 경교장에 울렸던 총성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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